BGM♬ 에피톤 프로젝트 - 바이올렛
* 하이앤로우 더 워스트 from 6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마에카와 아라타 x 키리하라 세이지
“세이지가 다시 입원했어.”
마도카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렸다. 침착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그 목소리에 아라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언젠가, 그 언젠가의 세이지의 얼굴이 아른거려 차마, 아무 말도.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아라타는 짧은 침묵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어… 어. 병원은 저번과 같은 곳? 병실은?”
간신히 꺼낸 질문에 대답하는 마도카의 목소리가 점점 걱정에 물들어 흐려졌다. 그 목소리에 아라타는 차마 혼란한 머릿속을 정리할 여유가 없었다. 서둘러 되는대로 말을 떠든다.
“도카. 괜찮아, 내가 가볼게. 응… 울지 말고. 그래. 다시 연락할게.”
콩쿠르에 입상한 이후 마도카는 더욱 바빠졌다. 짬 낼 여유가 없는데 당장 소중한 친구는 아프지, 오죽 답답했으면 울면서 연락했을까 싶었다. 그래도 마도카는 신야가 알아서 잘 달래주겠지.
시간을 확인한다. 약 10분 후면 브레이크 타임. 점심 끝 무렵이라 가게 안에도 손님이 적었다. 아라타는 잠시 놓았던 팬을 다시 잡고 꺼놨던 불을 켜 팔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제 다루는 법이 몸에 익어 익숙하게 팔이 일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엔 세이지 생각이 가득했다. 퇴원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입원했다는 소식에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라타에게는 세이지를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지막 주문을 내보내고 난 후, 아라타는 제 스승인 마스터에게 허락을 구하고 브레이크 타임 동안 자리를 비우기로 했다.
몇 번이나 방문했던 병원은 여전히 백색소음이 가득했다. 안으로 들어선 아라타는 간호사가 차트를 정리하는 데스크로 다가간다.
“저기… 키리하라 세이지 씨의 병문안을 왔는데요. 어느 병실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 키리하라 환자분 말씀이신가요. 7014호예요.”
상냥한 대답에 고개를 숙인 아라타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냥 늘 그랬던 것처럼. 평소와 같이 세이지를 대하자. 그렇게. 아라타는 홀로 고개를 끄덕이며 7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로부터 빠져나왔다. 조용한 복도의 벽에는 휠체어 몇 대와 간이 의자 몇 개가 붙어서 세워져 있었다. 아라타는 그곳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14호 앞에서 멈추어 선다. 문 옆에 단정하게 쓰인 명패.
[키리하라 세이지 님]
이름이 딱 하나만 적혀 있는 걸로 봐선 독방을 받은 모양이다. 그러니까 아라타는 지금, 세이지와 단둘이 될 수 있다. 괜히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고 문을 노크한다.
“……네.”
대답이 들리고 문을 연다. 환자복을 입은 세이지가 반쯤 올린 침대에 기대앉아 창밖을 보다가 시선을 돌린다.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어라.
방금, 시선 피했지?
아라타는 아주 짧은 찰나를 눈치채고 의아하게 여기며 안으로 들어섰다. 이전에도 세이지가 입원해있는 동안 늘 먹거리를 하나씩 만들어왔던 아라타였다. 그는 이번에도 간단하게 만든 오이 계란 샌드위치를 담은 통을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는다.
“안 챙겨줘도 되는데…… 고마워.”
옅게 미소를 띤 채로 통을 받아 든 세이지가 어색하게 아라타를 바라봤다.
“습관 같은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또 입원이라니.”
세이지는 몇 달 전 기억의 대부분을 잃어버릴 정도로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지금의 세이지는 다섯 명의 친구와 함께 보냈던 추억조차 잊은 상태였다. 이제 겨우 조각들을 찾아 한 페이지, 한 페이지씩 복구해 나가던 참이었다. 그랬는데.
“음, 교통사고 후유증 같은 게 있을 수도 있다고…”
말끝을 흐리며 습관처럼 다시 웃는다. 상대를 안심시키려는 듯한 가벼운 미소로 얼버무리기. 세이지의 버릇 중 하나였다. 무언가를 숨기고 싶을 때 나오는, 몸이 기억하는 습관. 대개는 상대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미소로 억누를 때 나오던 것이다.
절망 단지의 희망. 그 어깨에 우리들의 희망까지 떠안고 있었던 세이지. 이제 아라타를 포함한 다섯 명은 각자 길을 찾아 나아가기 시작했으니 다른 이의 희망까지 짊어질 필요가 없다. 그래서 너는 맘 편히 우리를 잊은 걸까. 우리는 그 누구보다 빨리 너를 찾았어야만 했다.
아라타는 쓴물이 올라오는 속을 감추며 평소와 같이 입을 연다.
“검사는 해봤고? 결과는?”
“이상은 없다고 해. 혹시 모르니까 며칠만 더 경과를 보고 퇴원하라고 하셨으니까, 큰 문제는 아니야.”
“아. 그래…”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저기, 아라타…”
조심스럽게 세이지가 아라타의 이름을 부른다. 그 부름엔 여전히 어색함이 남아있다.
“응?”
“후지오나 다른 애들에겐 얘기하지 말았으면 해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작게 덧붙인 말에 아라타는 잠시 인형같이 굳은 세이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답했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아마 다른 애들은 모를 이 답답한 침묵. 둘만 남으면 찾아오곤 하는 정적이었다. 아라타야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지만, 세이지는 이상하게도 아라타가 거북했다. 분명 소중한 친구라는 사실을 아는데. 느끼고 있는데.
“…아. 좀 먹어 볼래. 네가 좋아하는 걸로 만들어 왔는데.”
분위기를 깨고자 아라타가 먼저 움직였다. 협탁에 올려뒀던 샌드위치 통을 들어가져온다. 통을 열고 샌드위치를 하나 꺼내주려는 순간 세이지의 손과 닿았다. 그냥 가벼운 접촉일 뿐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아……!”
그러나 세이지는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손을 거뒀다. 세이지? 라고 불러볼 틈도 없이, 고개를 들어 바라본 세이지는 부딪혔던 제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싼 그대로 당황스러운 눈을 한 채 아라타를 보고 있었다. 놀란 탓인지 세이지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목까지 붉어진 세이지의 눈빛이 일순 공포에 물들어 아라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마에카와 아라타는 몇 달 전, 키리하라 세이지에게 고백받았다.
어느 날 아라타의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던 세이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라타와 함께 걸었다. 평범한 일상 이야기. 친구들의 이야기. 아무렇지도 않은 흔한 이야기 속에서 세이지는 육교 가운데에 서서 불쑥 말했다.
‘아라타, 좋아해.’
친구로서도 좋아하지만, 그보다 더 깊이.
그게 세이지가 아라타 자신을 애정의 상대로 보고 있다는 의미인 건 충분히 안다. 아라타의 사고가 멈췄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아라타를 향해 쓰게 웃은 세이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뭔가… 어떻게 변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어. 한 번쯤 전하고 싶어서. 내 욕심에 말려들게 해서 미안해.’
그럼, 다음에 봐. 세이지는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가 놓고는 몸을 돌렸다. 얼굴을 감추듯이 돌린 등을 바라봤을 때, 이대로 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아라타는 서둘러 걸음을 따라잡아 세이지의 팔을 잡아 돌렸다.
‘세이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줄래? 내가 진지하게 대답하게 해 줘.’
그런 대답을 듣고도 세이지는 흐린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딱 하루 뒤, 세이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아라타는 세이지의 병문안을 다녀온 그날 밤, 쉽게 잠들지 못하고 여러 번 뒤척이기만 했다. 내일도 이른 아침에 출근해 수프를 끓여둬야 하는데. 어떻게든 잠들려고 눈을 감아도 그 얼굴이 아른거렸다.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는 세이지의 눈빛. 자신과 닿는 것조차 꺼렸던 세이지의……
어둠이 누르고 있는 허공에 손을 들어 바라본다. 순간적으로 세이지에게 닿았던 손. 이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접촉이 새삼스럽게 의식이 된다면. 그건 몇 달 전의 고백 탓일까, 아니면 자신이 변한 것일까. 아라타는 복잡한 눈으로 제 펼친 손바닥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세이지의 손은 말도 안 되는 열기를 담고 있었다. 닿은 제 손까지 홧홧할 정도로.
세이지는 자신이 한 고백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제 아라타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조용히 입만 다물고 있으면 세이지도 마음 아플 필요 없이 친구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없었냐고 한다면 아라타는 쉽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다. 하지만 아라타는 더는 비겁해지기 싫었다. 그리고 정말 친구로 남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마치 세이지의 열기가 옮은 것처럼 그때 닿은 손이 뜨거워 참을 수 없었기에. 세이지를 봐야 했다.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아라타는 병원을 향했다. 출근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얼굴만 보고 가자, 얼굴만. 그렇게 생각하며 세이지의 병실 문을 열면 여전히 세이지가 앉아 있었다. 한 박자 늦게 아라타를 돌아본 세이지는 또 당황한 낯빛을 했다.
“……아라타.”
“어, 음. 잘 지내나… 걱정이 돼서.”
“보시다시피 잘 있어.”
“그으…러네.”
침묵. 아라타가 속으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머리를 팽팽 돌리는 동안 먼저 입을 연 것은 세이지였다.
“아라타, 할 말이 있어.”
“어어, 말해.”
세이지는 제 두 손을 맞잡은 채로 아라타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가만히 하얀 이불 어딘가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입원한 이유… 말이야. 며칠 전부터 열이 갑자기 올랐는데… 그게 떨어지지 않았어. 그래서 입원한 거야.”
열이. 열기를 가득 담고 있었던 세이지의 손이 문득 아라타의 눈에 들어왔다.
“원인은 모르겠대. 그런데… 그,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열이… 널 보면 들끓는 것처럼 어지러워져서.”
아라타는 숨을 죽인 채 세이지가 하는 말에 집중했다.
“그래서 정말 미안한데… 아라타. 당분간은… 그만 와줬으면 좋겠어.”
조심스럽게 이어지는 부탁. 이건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세이지는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만. 네게 사과 같은 걸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나는. 아라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병실에서 벗어났다.
아라타는 그날 레스토랑을 쉬었다. 결근을 위해 둘러댄 사유는 열감기였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매트리스에 누운 아라타는 손을 맞잡은 채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이지를 방문하고 난 직후 갑자기 열이 올랐다. 화가 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닿았던 손으로부터 시작된 열기는 머리를 잠식하고 몸을 지배했다.
세이지에게 당분간 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확실히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아라타 자신이 어떤, 그 어떤 짓을 하더라도. 친구들을 밀어내고 레드럼을 팔던 때에도. 끝까지 자신을 붙들었던 세이지였다. 추락하는 기분이 이런 건가. 어쩌면 나는 자만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세이지는 나를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절대로 자신을 두고 갈 일은 없겠구나… 하고. 그런 네가.
너만은 날 놓으면 안 되잖아.
세이지. …세이지.
…아. 아라타는 결국 깨닫는다. 나는 비겁한 새끼가 맞았다.
그로부터 꼬박 이틀을 앓았다. 그동안 혼자 이 열을 견뎠을 세이지의 고통을 체험하면서 내리 앓던 아라타는 사흘째가 되었을 때 겨우 멀쩡히 일어날 수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아라타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자신에게 찾아온 원인 불명의 열병을 진료받기 위함이 아니었다. 병원 정문에 도착했을 무렵, 사복 차림으로 나오는 세이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라타는 성큼성큼 그쪽으로 걸어가 세이지의 손목을 붙들었다. 맞닿은 피부는 여전히 뜨거웠다. 누구 할 것 없이.
“아, 아라타.”
“얘기 좀 해.”
“잠깐, 잠깐만. 아라타!”
세이지를 거의 끌고 오다시피 한 아라타가 멈춰 선 곳은 낡은 아파트 앞이었다. 희망 단지. 우리가 처음 만나 함께 자란 고향.
“여긴 왜……”
“이때부터 시작했어. 나는.”
“뭐?”
영문 모를 말을 꺼내는 아라타의 등을 바라보며 세이지는 이상하게 떨렸다. 무슨 말이 흘러나올지 무서웠다. 아라타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그 말은 자신을 무자비하게 흔들어 놓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가능하다면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 도망가면 아라타와는 완전히 끝이다. 세이지는 땅에 발이 붙박인 것처럼 서 있었다.
“겉도는 내 손을 처음 잡아줬던 게 너잖아, 세이지.”
“하지만……”
내게 그런 기억은 남아있지 않아, 아라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꿰뚫어 본 것처럼 아라타는 몸을 돌려 입술을 꾹 닫고 있는 세이지를 바라봤다. 한 걸음 다가간다.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아라타의 손가락이 세이지의 뜨거운 손에 감겨왔다. 손가락이 얽힌다. 세이지는 속수무책으로 옭아매는 손가락을 떨쳐내지 못했다. 하나하나 되살아났다. 차가운 바람이 묻어나던 밤, 육교 위, 지나가는 자동차가 내는 소음, 자신이 흘렸던 숨소리, 그리고……
“앞으로는 같이 기억하면 되고.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더 근사한 단어를 많이 알고 있다면 좋았을걸. 아라타는 터질 것만 같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세이지를 끌어안았다. 세련된 말도, 흔한 꽃다발 하나도 없는 초라한 이 말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기다리게 했는지.
“…좋아해, 세이지.”
다시는 놔주고 싶지 않을 만큼. 어쩌면 집착까지 느껴지는 속삭임을 들으면서도 세이지는 아라타의 품에서 한 번, 조용히 호흡한다. 다시 열이 올랐다. 맞닿은 몸이 뜨거웠다. 제 목덜미에 파묻은 아라타의 뺨으로부터 열기가 느껴졌다. 내 열병이 옮았나? 어쩌지? 그런 걸 생각할 여유도 없이, 세이지의 손이 들려 아라타의 등에 감겼다. 가슴이 바짝 붙었다. 정신없이 뛰는 이 고동이 내 것인지, 네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 너무나 뜨거워서… 이대로 터져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답이… 너무 늦어, 아라타.”
“응. 미안.”
한 사람만이 품기엔 너무나 뜨거웠던 열이 이제야 온기가 되어 몸을 감쌌다.
'HiGH&LOW'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토도무라]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0) | 2025.01.28 |
|---|---|
| [코브무라] Like 아니고 Love (0) | 2025.01.28 |
| [아마미야 형제] 그 고양이의 하루 (0) | 2025.01.27 |